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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사람들

60-70년대

2021.01.06 06:45

김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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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58년~1979년
당시 21세
전라도 광산군 비야면 출생
이력 1971년 초등학교 6학년때 공장에서 노동자로 생활

1975년 YH무역 입사 후 78년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

1979년 8월 11일 신민당 점거농성 중 경찰의 살인진압으로 운명

김경숙.fw.png

 

우리 사회는 여성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기반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산업역군이라는 미명하에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단합을 통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역사 속에 가발수출 공장이었던 YH무역 노동조합이 있다.

 

 

김경숙 동지는 1971년 광주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서울에 상경하였다.

 

김경숙 동지가 근무하던 YH무역은 19755월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YH무역은 1백만 원의 자본금으로 불과 2년 만에 노동자 400여 명, 1년 순이익 13억 원이라는 한국 최대의 가발업체로 성장하였다. YH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수십억의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폐업을 자행하였다.

 

YH 노조의 폐업에 맞선 120일 간의 투쟁과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민주노조를 파괴하는 악덕자본가와 이를 비호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김경숙 동지는 신민당사 농성 3일째 밤,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투신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생존권을 짓밟는 악덕기업주를 처벌하기는커녕 정당한 폐업철회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탄압, 김경숙 동지를 죽음으로 내몬 군사독재정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문동환, 고은, 이문영, 서경석 등 재야인사들이 구속되었고, 신민당사 강제 진압에 항의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던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했다.

 

19798월 여름, YH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과 김경숙 사망사건은, 197910월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장기집권 해온 박정희 유신체제는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 YH무역 여공사건(신민당사 농성투쟁)에 대한 설명

 

발생일: 1979년 8월 9일

종료일: 1979년 8월 11일

발생지: 신민당사

관련자: 김경숙, 김영삼, 최순영, 박태연

정의: 1979년 8월 9일∼11일 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이던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들 중 1인이 경찰의 강제 진압에 의해 사망한 사건.

 

키워드

YH사건

부마항쟁

노동운동

 

  사건의 배경

1966년 설립된 YH무역주식회사는 1970년대 초반에는 종업원 4천여 명에 수출 순위가 15위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한 회사였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고, 수 차례 노조 결성 시도가 실패한 후인 1975년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가발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자 YH무역의 경영주는 경영부실 상황에서 자금을 해외로 유출했으며, 노동자 인원 감축, 위장 휴업, 하청화 등을 단행하였다. YH노조는 1978년 5월, 1979년 4월에 회사측의 폐업 철회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 이후 회사 정상화를 위해 청와대, 정부 당국 및 채권 은행, 미국 대사관 등에 탄원을 하였지만, 회사는 자진 사표를 권유화 하는 등 정상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 지방 각지에서 상경하여 저임금 노동을 하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회사의 폐업은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고, 정부의 친기업적 노동 탄압 정책 하에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는 유명무실한 실정이었다. 이런 조건 하에서 회사측의 방만한 경영과 일방적 회사 폐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사건의 전개

1979년 8월 6일 회사에서는 다시 폐업 공고를 했고, 7일에는 일방적으로 회사 기숙사 식당을 폐쇄한다고 발표하였다.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YH노조는 도시산업선교회 등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노동자들 일부를 기숙사에 잔류시키며,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8월 9일 새벽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에 187명의 노동자를 결집하여 농성을 벌였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농성장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격려하였고,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였다. YH노동자들의 농성 사건은 크게 언론에 보도되어 여론화되었고, 각종 시민사회단체의 지지와 방문이 이루어졌다. 8월 10일 신민당은 국회 보사위원회 소집을 요구하였으나, 정부와 여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이 사건을 논의할 수 없었다. 오후가 되어 YH무역 사장이 신민당사를 방문하여 회사를 은행관리로 넘기고 폐업을 철회하겠다고 했고, YH노조는 해당 조치가 취해지면 농성을 해제하겠다고 했으나, 그 이후 진전이 없었다. 경찰의 진압 압박이 강화되자, 김영삼 총재는 당사를 포위한 경찰의 철수를 요청하고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 1천여 명이 신민당사로 진입하여 총재실 등을 파손하고, 김영삼 총재, 국회의원, 기자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이 농성중이던 4층에도 경찰이 진입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이 와중에 YH노동자 김경숙이 왼쪽 팔목 동맥이 절단되고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하였다. 또한 YH무역 기숙사에서 농성중이던 58명의 여성노동자들도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노동자들은 8월 13일 회사로 옮겨져서 퇴직금, 7·8월 임금을 지급 받았다. 노동자들은 당초 회사가 약속한 상여금, 월차수당, 8개월분의 해고수당을 주지 않자 항의를 했지만, 경찰에 의해 준비된 버스로 귀향하게 되었다.

8월 17일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주동자로 최순영 지부장 등 노조간부와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 한국사회선교협의회 문동환, 서경석, 고려대 교수 이문연, 시인 고은 등을 「국가보위법」,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신민당은 노동탄압과 경찰의 국회의원 폭행, 야당 파괴 공작 등을 비판하고 18일간 농성을 벌였다.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도 YH노동자, 목사, 지식인 등의 구속에 항의하였다. 정부는 8월 16일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종교 단체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산업체 등에 대한 외부세력 침투실태 특별조사반’을 설치하고 기업체의 실태를 조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민당 의원들의 항의 농성이 벌어지고, 종교계·언론인·해직교수협의회·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주청년협의회 등 민주화운동 세력의 비판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4일에는 국회에서 김영삼이 국회의원 제명을 당하자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런 정치, 사회적 분위기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로 인한 부도 기업 속출 등에 대한 불만은 10월 16일 부마항쟁을 촉발하게 되었다. YH무역 여성노동자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은 1970년대 정부의 노동자 억압을 통한 경제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박정희정권이 몰락하게 되는 일련의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노동운동사-경제개발기의 노동운동: 1961∼1987』(이원보,지식마당,2004)

『YH노동조합사』(전YH노동조합·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편,형성사,1988)

『노동현장과 증언』(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풀빛,1984)

  집필자

집필 (1995년)

곽해선

개정 (2011년)

laotao@hanmail.net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와이에이치무역여공사건(─貿易女工事件))]

 

 

 

 

 

- 1979년 10월 부마항쟁에 대한 설명

 

 

이칭: 부마민주화운동, 부·마항쟁, 부마항쟁, 부마사태

발생일: 1979년 10월 16일

종료일: 1979년 10월 20일

발생지: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마산시

정의 :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쟁 사건.

 

키워드

부산

마산

박정희 정부

유신체제

민주화운동

 

  역사적 배경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한계에 이르렀다. ‘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유신 정국은 긴장을 더해 갔다. 대표적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오원춘사건(吳元春事件)’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고, 잇따라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는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고,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1979년 4월 긴축 등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정부는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더욱 부채질하여 기업의 부도율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고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하층민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됐던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이런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연관되어 있었다. 1979년 당시 부산의 산업별 생산구조는 광공업 비중이 42.1%인데 비해 전국의 경우 23.7%로 광공업취업구성비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부산은 신발, 의류, 합판 등 영세한 자본과 낮은 수준의 기술이 결합한 저부가가치 제조업이 주를 이뤘으며, 1966년 부산 내 제조업 종사자의 비율은 73.3%, 1975년에는 77.3%, 1980년에는 73.5%로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1979년에 들어서 부산지역 경제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 서울에 3배에 달했고, 수출증가율 역시 전국증가율인 18.4%에 훨씬 못 미치는 10.2%로 하락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은 이런 정치, 사회경제적 모순이 모여 일어난 학생·시민들의 반정부 민중항쟁이었다.

 

 경과 및 결과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은「애국가」·「선구자」·「통일의 노래」등을 부르는 한편,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민주선언문」이란 이름의 유인물은 학원의 민주화, 언론자유, 인권보장에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고 선언하였다.

구호와 노래, 선언문 낭독 등으로 기세를 올린 학생들은 산발적으로 교문을 나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학생들은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애국가」등을 부르는 한편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에 진출,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경찰관과 학생 100여 명이 다쳤다. 이튿날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날부터의 데모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한 사실이었다. 오후까지 시위는 학생들에 의해 주도됐으나 야간시위에서 시위대는 3분만에서 5만에 이르렀고 시위대에는 화이트 컬러, 노동자, 상인, 업소 종업원, 고교생들도 동참했다. 17일에 이르러서는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상태 자유노동자, 무직자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부산시경의「79부마사태의 분석」이란 문건을 보면 데모의 특이양상으로 “20세 전후 불량성향자 대학생 가장 합세(때미리, 식당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 시민들 박수/음료수 공급 등 데모학생 동조 고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학생 시위는 이미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학생·시민들은 KBS부산방송국과 도청·세무서·파출소 등을 파괴하였고, 일부 경찰차량과 보도기관의 취재차량도 피해를 입었다.

한편, 민주화운동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됐다. 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공화당사·방송국·신문사에 투석,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수십 명의 청년들은 공화당사의 셔터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서류와 집기를 밖으로 내던졌고, 파출소로 뛰어 들어간 또 다른 청년들은 벽에 걸려 있던 박정희의 사진을 파손했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날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산업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다. 주목할 사실은 공장직공·점원·날품팔이 등으로 보이는 10대 내지 20대의 젊은이들이 가담하여 시위의 앞장에 선 점이었다. 이들의 행동은 격렬하여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 이처럼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부가세를 없애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나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18일 0시를 기해 포고문 제1호를 발표, 각 대학의 당분간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의 2시간 연장 등 8개항을 포고하였다. 계엄사령부는 10월 24일 군·검합동반을 편성, 계엄시기 중 조직깡패를 발본키로 특별수사부를 설치, 소탕작전에 들어가 132명을 검거하고 23명을 구속 처리하였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다. 이와 함께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일원에 군을 진주시켜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등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통행금지가 2시간 연장되었고, 경남대학과 경남산업전문대학은 무기한 휴교조처가 취해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의의와 평가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을 둘러싸고 민주화 운동의 성격, 지도세력 등 여러 평가들이 있으나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과 함께 유신체제를 아래로부터 붕괴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제11851호, 2013.6.4. 제정)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대통령령 제24901호, 2013. 12. 4. 제정)에 따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유고』1·2(조갑제,한길사,1991)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마항쟁 10주년 기념사업회,1989)

『권력의 몰락』(이상우,동아일보사,1987)

『거역의 밤을 불사르라-10월 부마민중항쟁사-』(부산대학교 총학생회,1985)

「부마항쟁」(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1970년대 민주화 운동』Ⅳ,1986)

「부마사태의 전모를 밝힌다」(이수언,『신동아』5월호,1985)

『권력의 몰락』(이상우,동아일보사,1987)

  집필자

집필 (1995년)

 

 

 

 

- 10.26 사태에 대한 설명

 

 

발생일: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관련자: 김재규, 박정희

정의 :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살해한 사건.

 

 

 

  개설

십이륙사건·십이륙정변·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 등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몰락했다.

 

  역사적 배경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1인 집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하여 나아갔다. 특히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1972년 10월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 오면서 그 동안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은 이 부문에로의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목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는데, 1979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한국경제의 고성장 전략 추진과정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18.3%에 달하였다.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상받으려 하였지만 독재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민심은 체제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의한 고도성장 전략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대적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경제 위기의 심화 과정에서 이들 계층의 소외감도 점차 심화됨으로써 그들의 생존권 요구도 거세어졌다.

대외적으로는 1977년에 출범한 미국의 카터(Carter, J.)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미군철수라는 카드를 이용해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거부해 한·미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또한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시도하면서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박동선(朴東宣) 사건까지 겹쳐 한·미관계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세력과 야당은 반 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1972년 유신체제 출범부터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의 구속 등이 계속되었으나 민주화의 방향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특히 1978년과 1979년은 정치·경제적 모순이 정치적 위기로 연결된 시기였다.

 

 

  경과

1978년 동일방직사건과 함평고구마수매사건 등의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급격히 고양시킨 사건이었다. 그 해 12월 12일의 제10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올려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 31.7%를 앞지르게 되었는데 이는 민심의 이반(離反)주 01) 현상이 표출된 사례인 것이다. 이에 집권여당은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극단적인 강경 대응 이외에 여타의 대응책을 찾지 못하였다.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오원춘 사건은 유신정권과 가톨릭 세력의 정면충돌을 야기시켰다. 1979년 8월의 YH사태는 이전의 노동소요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소규모 수출 업체로서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YH노조의 여공들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당시 김영삼(金泳三) 총재하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 투쟁을 전개하던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내로 진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YH사태는 소규모의 비체제적인 노사갈등에 불과하였으나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야당을 비롯한 전 민주화운동세력과 유신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김영삼은 유신철폐의 선명한 기치를 내걸어 중도통합론을 표방한 이철승(李哲承)을 1979년 5월의 전당대회에서 누르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하였었다.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통일을 위해 김일성(金日成)을 만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의 축출을 기도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하였고, 김영삼의 정적인 이철승계의 인물들이 전당대회 결과의 무효를 제소해 법원은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하였다.

국회는 더 나아가 김영삼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4일 그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하였다. 결국 정부는 야당까지도 제도권 정치의 틀 밖으로 내모는 형국을 초래하였다. 그 동안 쌓였던 국민의 불만이 김영삼 출축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창원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유신체제의 종말을 초래하였던 부마항쟁으로서 이 지역은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10월 15일의 시위는 부산대학교의 학생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주동자들이 연행됨으로써 확산되지 못하였으며, 본격적인 시위는 16일부터 이루어졌다. 16일 교내에서 집회를 가진 부산대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였고, 이에 동아대·고려신대, 고등학생, 전문대생 등의 학생에다가 일반시민까지 가세하였다.

3,000여 명의 시위대는 게릴라식으로 경찰과 충돌하였고 자정에 이르도록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였다. 17일에는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시민들의 호응 속에서 시위군중은 경찰서·파출소·세무서·동사무소·신문사·방송국 등에 투석하였다.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16일부터 17일 이틀 동안 경찰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 파출소가 파손 또는 방화되었다. 18일 자정에는 부산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 등의 군병력이 투입되어 시위군중을 진압하였다. 18일에는 경남·마산 일원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경남대에 무기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오후 6시경부터 시작된 시위는 곧 2,000명의 시위군중을 이루어 공화당사를 공격하고 파출소·신문사·방송국·법원·검찰청·동사무소 등에 피해를 입혔다. 19일 밤에도 마산·창원 지역에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자 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한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던 부마항쟁은 강경진압에 의해 일단 해결되었으나 그 대응 방식을 둘러싼 집권층 내부의 갈등을 야기시켜 10·26사태를 발생시켰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은 부마항쟁에 관한 강경진압을 주장하였으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인은 서로 경쟁적인 입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의 입장을 수용해 강경진압을 채택하자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위기에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김재규는 군 후배인 차지철의 월권과 자신에 대한 무시, 그리고 그에 대한 대통령의 편애를 견딜 수 없었다. 그날도 박정희는 부마항쟁의 책임을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에 돌렸으며, 차지철도 중앙정보부의 무능함을 지적하였다.

 

  의의와 평가

10·26사태 직후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10월 말 군부 고위층은 유신헌법의 폐기를 결정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10·26사건을 사전에 알지 못하였다고 주장했다.

10·26사태는 유신체제를 무너트린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김재규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민주화를 위한 의거’는 아니었다. 이전부터 민주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것이 아니었던 김재규가 의거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서둘러 만들어 낸 사후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김재규와 그 하수인들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하기는 하였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었으며 차지철과의 개인감정이 표출된 우발적인 범행으로 볼 수 있다.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와 사전 모의는 하지 않았으며 단지 ‘거사 후 연대’를 시도하기 위해 10·26 당일에 궁정동 안가의 별실에 초대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승화는 연대를 거부해 쿠데타로 진행되지는 못하였으며, 결국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집권하는 빌미를 만들어 주었다.

10·26사태로 민주화가 되기보다는 권위주의 통치가 연장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시해는 박정희의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김재규의 명분론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시해하였다는 것도 동양적인 유교 윤리에 벗어나는 것이었다.

후속 정권도 이러한 역사적 선례를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재규 일당은 사형되고 10·26사태에 대한 법적 심판은 일단락되었다.

법적 심판은 그렇다하더라도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 10·26사태의 마무리 과정에서 12·12사태가 일어나는 등 민주화가 지체되기도 하였지만 10·26사태 자체는 민주화를 요구하였던 부마항쟁으로 촉발되었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붕괴와 군부독재 종식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알려지지 않은 역사  (윌리엄 글라이스턴, 중앙 MB, 1999)

12·12와 미국의 딜레마  (존 위컴, 중앙 MB, 1999)

12·12,5·18 실록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1997)

체제변동의 정치사회학  (성경륭, 한울출판사, 1995)

제5공화국 정치비사  (이덕봉, 고려기획, 1988)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정승화, 까치, 1987)

「10·26사건」(『월간조선』,1989년 11월호)

「군부 권위주의 체제의 내부모순과 변화의 동학」(최장집,『한국정치·사회의 새흐름』,1986)

「10월 26일의 8시간」(『월간조선』,1984년 11월호)

  주석 

주01

민심이 떠나서 배반함

  집필자

집필 (1999년)

이완범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0·26사태(十二六事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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