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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사람들

1980년대

2021.01.06 13:20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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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65년~1987년
당시 22세
부산 서구 아미동 출생
약력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대학문화연구회' 등 활동

1986년 노학연대 활동 중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참가하여 구속, 집행유예로 출소

1987년 1월 1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의해 연행 후 고문폭행으로 다음날 운명

박종철.fw.png

 

1987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중요한 사건은 바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었다.

 

박종철 열사는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4년에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후에는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한편 이 시기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 모두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직선제 개헌 운동을 막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더욱 과격하게 억압하였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세력은 모두 간첩과 연관된 불순 세력으로 매도하였고, 고문을 해서 거짓 자백을 받아내거나 증거를 조작하는 등 불법적인 수사를 자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박종철 열사도 잔혹한 물고문 끝에 돌아가고 말았다.

 

박종철 열사의 사망이 드러나자, 전두환 정권은 박 열사의 사망 원인이 단순한 심장 마비였다고 왜곡하는 등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하였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 발표를 서슴치 않고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이 깊어가는 가운데,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이 박종철 열사의 사인이 물고문이었음을 폭로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권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이 즈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고문 살인 정권 퇴진 운동이 뜨겁게 전개되었다.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이 민주화를 앞당기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 이후 경찰은 증거를 인멸하고자 시신을 서둘러 화장했다.

 

그리고 열사의 유골은 임진강에 뿌려졌다.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 씨는 이 일을 한스럽게 여기었다.

 

박 열사의 죽음을 기억할 만한 표지로써 묘를 마련하여, 민주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찾아가 잠시 고개 숙이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 하셨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1989년에 이 자리에 박종철 열사의 묘와 비석이 세워졌다.

 

비록 박 열사의 시신을 이 묘에 모시지는 못했지만, 그의 높고 아름다운 뜻을 되새길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 6월 민주 항쟁에 대한 설명

 

정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호헌조치」발표 후, 그해 6월 10일을 정점으로 20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중항쟁이자 민주화운동.

 

  역사적 배경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핵심내용으로 하는「4·13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 성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해 5월 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하여 형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이후 국민운동본부는 육십항쟁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식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의 분노는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6월 10일로 예정된 국민대회에 출정하기 위해 연세인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공식 주도한 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약 24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경찰은 6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전국 각지로 분산된 경찰 방어력은 자신의 커다란 한계를 보여줄 뿐이었다. 게다가 시위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산발적인 야간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 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특히 서울 명동성당 점거농성은 6월 15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는 항쟁의 지속과 전국적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국민운동본부는 산발적 시위투쟁을 다시 결집시키기 위해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최루탄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날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일제히 시작된 이 대회에는 150여만 명의 민중이 참여하였다.

이날 부산 지역 시위에서 이태춘은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 직후 얼굴 전체에 최루탄을 뒤집어 쓴 채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졌다.

6월 24일전두환과 김영삼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되자,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 날의 평화대행진은 사실상 유월항쟁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30여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날 경찰은 전국적으로 10만여 명의 경찰병력을 배치했으나 효과적인 진압작전을 벌이지 못하였다. 전국적으로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이 날의 평화대행진은 당시 민주화투쟁의 열기를 한군데로 집약시킨 결과물이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6·29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결과

유월항쟁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점증된 민주화 열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왔다. 그러나 유월항쟁에 참여한 다양한 저항 주체들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요구 관철 이후 이해관계에 따라 급속히 해체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유월항쟁의 부분적 성공은 한국현대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달성은 1980년대 후반 사회 각 부문 운동이 분화되고 조직화되는 계기가 되어,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과 농민집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6월항쟁(六月抗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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