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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사람들

1980년대

2021.01.06 13:26

안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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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63년~1988년
당시 25세
전남 남원 출생
약력 1982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 '대학문화연구회'에서 활동

1985년 집시법 위반으로 1년형을 받고 김해교도소에서 만기출소

1988년 5월 26일 평소와 같이 외출하였다가 행방불명

안치웅.fw.png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실종되거나 의문사 한 분들이 상당수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분인 안치웅 열사이다.

 

1982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한 안치웅 열사는 민주화추진위원회 핵심 활동가로,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지원하다 그 해 6월 구속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8674일 출소했다.

 

그러나 안치웅 열사는 공안기관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던 중 1988526일 오전 아는 목사를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선 후 행방불명됐다.

 

안치웅 열사가 출소한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학생-노동운동 지도부, 특히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부 궤멸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때다.

 

안치웅 열사는 출소 이후 복학하여 19882월 졸업 후 실종될 때까지 기관원들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끊임없는 감시와 미행을 당해 왔음을 여러 정황에서 알 수 있었다.

 

 

북파공작 특수부대원이라는 박모씨는 “’1986년 여름경 학생운동을 하였던 안치웅이라는 대학생을 납치·살해한 후 저수지에 수장했다고 서울방송(SBS)에 제보하였으나, 박모씨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여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도 제대로 진상규명이 되지 못한 상태이며, 가족들은 아직도 애타게 동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0712,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는 재심의를 통해 안치웅의 행방불명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발생한 것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1529일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는 23년 전 실종된 안치웅 열사의 초혼장이 열렸다.

 

'민주열사 안치웅 장례위원회''안치웅 동지는 행방불명이 아닙니다'라는 글을 통해 "역사가 진실을 안다면 안치웅은 행방불명이 아니다. 의문사가 아니다"라며 "독재자들에 의한 타살이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독재자들은 안치웅을 사회와 역사로부터 은폐하려 했지만 결코 은폐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와 같은 죽음들이 형태만 달리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민주화추진위원회에 대한 설명

 

민주화추진위원회(民主化推進委員會)는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 조직으로, 약칭은 '민추위'(民推委)이다. 산하에 노동문제투쟁위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간 연락책 등 4개 기구를 두고 1985년 3월 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를 결성, 5월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을 주도하였다.

 

-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설명

 

정의 

1985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구로지역의 민주노조들이 노조운동탄압에 맞서 벌인 동맹파업과 지지연대투쟁.

 

  내용

1983년 말 정권의 유화조치로 노동운동이 일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1985년 4월 대우자동차투쟁을 기점으로 노동운동은 다시 탄압받게 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이 활발했던 구로지역은 주요 탄압대상이었다.

1985년 6월 22일 경찰이 4월의 임금인상투쟁을 불법이라며 대우어패럴 위원장 등 노조간부 3인을 구속했다. 이에 6월 24일부터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항의 파업을 시작으로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가 동맹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구속자 전원석방, 노동운동탄압중지, 민주노동운동을 짓밟는 모든 악법 즉각 철폐, 노동부 장관 사퇴” 등을 요구했다.

6월 25일에는 구로공단의 남성전자, 세진전자, 롬코리아 노동자들이 작업시간 이후 지지농성투쟁을 벌였다. 6월 27일에는 삼성제약 조합원들이 점심식사 거부로, 그리고 청계피복노조는 6월 25일 구로공단에 지지선전물을 배포하고, 6월 26일의 가리봉 가두투쟁을 주도하면서 지지를 표명했다.

6월 26일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회원이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지지농성을 하면서 ‘현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은 스스로의 말로를 재촉할 뿐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학생들도 전국학생총연합회 명의의 선전물 배포와 가리봉 가두시위에 참여했다. 농민운동단체들도 정권의 노조탄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구로동맹파업의 성격은 시간이 갈수록 노조간부 구속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정권을 규탄하는 투쟁으로 변화했다.

이후 6월 29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폭력단 500여 명이 들어와 파업을 강제해산시켰고, 청계피복노조 사무실과 다른 3곳에서 지지농성을 하던 민족민주운동세력도 해산되었다. 이어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효성물산 조합원 36명도 5일간의 농성을 풀었다. 이 날까지 5개 사업체에서 약 1,400여 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벌였고, 5개 사업장에서 지지연대투쟁을 벌여, 총 2,500여 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또 구로동맹파업은 43명 구속,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해 해고 1,5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피해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한국전쟁 이후최초의 노동자 정치투쟁인 구로동맹파업은 정권의 탄압에도 노동자들이 기업별노조의 틀을 뛰어 넘어 정치적 연대투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구로동맹파업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 노동운동이 사회민주화를 위한 저항 주체로 성장하게 한 반독재민주화투쟁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구로동맹파업(九老同盟罷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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