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모란공원사람들

1980년대

2021.01.06 13:45

한희철

조회 수 1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생애 1961년~1983년
당시 22세
경남 마산 출생
약력 1979년 철도고 졸업, 서울대 카톨릭 학생회 활동

1982년 12월 군 입대

1983년 12월 11일 녹화사업을 받던 중 의문사

한희철 열사.png

 

한희철 열사는 1961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여 1979년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에 철도청 장학생으로 입학 후 동아리인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시작, 진리를 탐구하고 이 땅에서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카톨릭 신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동료들과 함께 이 땅 민중들을 억압하는 모든 모순들의 실체를 파헤치며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민중을 위한 삶으로 맞춰갔다.

 

서울대 카톨릭학생회에서의 활동과 성남시에서의 카톨릭노동청년회(joc) 조직, 성남시 대학생연합회 학술문화활동에의 참여, 성남ymca 탄천클럽을 통한 야학 운영 등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열사는 민주화 운동중에 군 입대를 피할 수는 없었기에, 198212월 군에 입대하게 됐다.

군 입대 후 그는 19831014일부터 보름간의 1차 정기휴가를 맞이했다.

 

그런데 휴가를 마치고 난 후 그는 그만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그해 126일 부대 근무 중 보안사로 연행됐다.

 

그는 휴가기간 중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다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인 한국외대생 신씨 및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후배들을 돕기 위해 주민등록증 위조에 도움을 줬는데, 결국 그 사실이 보안사에 인지됐던 것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소위 군부대 녹화사업을 받았다. 석방된 1210일까지 5일 동안 온갖 고문 속에서 혼자선 감내하기 힘든 취조를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복귀 다음날인 11일 새벽, 그는 보초 서는 자리에서 가슴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죽어있는 채로 발견됐다. 23살의 나이였다.

이후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보안사의 불법적인 연행, 조사 및 폭행 가혹행위와 죽음이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한 사망이었음을 밝혀내었다.

 

한희철 열사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녹화사업이란, 바로 전두환의 집권 초기 강제 징집된 학생운동 출신 대학생들을 특별정훈교육으로 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보안사령부(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가 마련한 계획이었고, 이 사업으로 인해 강제 징집된 사병들은 매우 강압적인 사상개조를, 학생운동 사건 관련자들은 불법연행에 이은 수사를 받으며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가혹행위에 무방비로 방치됐다.

 

여기에 더해 강제로 학생운동 동료들의 행적과 동향을 보고하는 프락치라 불리는 첩자의 역할도 하게 하였다.

이러한 악랄한 행위에 저항하다가 끝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열사를 추모하는 이들의 뜻에 의하여 이곳 모란공원 민주화 묘역에 안장되었다.

 

 

 

- 군부대 녹화사업에 대한 설명

 

박정희 정권시절의 YTP계획과 함께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독재정권의 불법사찰행위. 상기한 사진은 1981년 ~ 1983년 '녹화사업' 기간 중 대한민국 육군에서 의문사한 6명의 대학생들이다.

2002년 녹화사업과 관련된 글(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제5공화국 정권에서 대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뿌리뽑기 위해, 국군보안사령부(당시 사령관 박준병)에서 실행했던 비밀 공작이다. 대학생들 머리의 붉은 물[21]을 푸른 물[22]로 만든다는 의미로 '녹화사업'이라 명명하였다. 한자는 1번 문단과 같지만, 실제 의미와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이 시기 남자 대학생이었다면 누구나 이 사업의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제3공화국 정권과 제4공화국 정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공작을 행하였으나 후술할 내용을 참고하면 약간 다른 면이 있다.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되면 일단 강제휴학 & 병으로 입대처분, 그리고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당시엔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대학 학칙에 '지도교수가 학생을 휴학시킬 수 있다'는 항목이 있었다. 이를 빌미로 수사관들이 지도교수들을 찾아와서 반강제로 대상 학생을 휴학시킨 뒤, 제멋대로 입대영장을 뽑아와서 바로 입대시켜버렸다. 바로 잡아가서 입대영장 뽑아서 훈련소에 집어넣으므로 가족이나 친구들 입장에선 어리둥절하게 된다. 심지어 신검도 안 하고 무조건 현역병으로 집어넣었는데, 6대 독자(녹화사업 당시에는 징집면제대상), 눈이 나빠 면제받은 학생, 습관성 탈골이 있는 학생도 녹화사업으로 강제징병되었으며, 소아마비로 움직이는데 불편한 장애를 가진 학생도 녹화사업으로 강제입대되었다.

 

그리고 반대로 대학생 출신 입대자를 찾아서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하기도 했다. 대학생 출신 중에서 자신이 학군장교인 사관후보생이거나 보충역으로 나와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있는 경우에는 상관 없었다고 하고, 예비역들도 이미 군복무를 마쳐서 상관없었다고 한다. 운 좋게 화를 피한 경우다. 대신 몇몇은 사실상 해외 망명인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거주지에 따라 내륙지역 거주자는 육군, 수도권에선 김포시나 인천광역시, 부천시, 당시 시흥군 등 서해안 내진 한강 하구 등 해안 지역 및 제주도 등 도서 지역 거주자들은 전원 해군으로 갔는데, 예나 지금이나 수병은 지금은 폐지된 방위병과 그 후신인 현 상근예비역을 빼면 징집이 아닌 지원 형식으로만 뽑기 때문에, 해군에 녹화사업으로 끌려간 경우는 밑에 언급할 경우를 빼면 당시 징병권이 있던 해병대 소속으로 끌려갔고, 이들이 해군 인원으로 집계됐다.

 

녹화사업으로 강제입대할 경우, 육군은 군사특기를 보병에 주특기는 소총수로만 고정 배정토록 해 최전방의 휴전선 경계부대로 배속되었으며 해군은 제2해병사단 및 제6해병여단 등 해안 경계 부대로 배치했고, 이미 수병으로 근무 중일 때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되거나 대상자가 자진해서 해군에 입대한 훈련병일 경우는 전방 고속정에 배치했다. 녹화사업 대상자가 된 수병들은 고속정 외 근무지에서 근무하다가도 전방 고속정에 재배치되기도 했고, 통상 6개월 이상 함정 근무한 수병들이 대상이 되는 육상으로의 전출자 선발에서 무조건 제외해 전역시까지 고속정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다. 심한 경우, 해군에서 전역 임박한 녹화사업 대상자인 수병을 여러 사유로 전역을 연기해 붙들어 놓은 적도 있는데, 피해자 이상석 씨는 전역이 불법하게 연기되어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에 회부, 1년 징역형을 받은 뒤 해군 이병으로 전역했다. 단 공군은 군 특성상 없었다. 이 내용대로라면 공군의 특성상 자원입대한 공군병 중에서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하려고 하는 병사가 있다고 해도 지정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상이 대상인 만큼, 위에 언급한 예외를 빼고 이들의 신규 장교 임관은 철저히 막았다. 드물게 병 복무기간 만료 혹은 도중에 하사관에 지원해 군에 남는 것은 막지 않았는데, 당시 하사관에 대한 처우와 대민 인식이 오늘날 부사관에 대한 그것보다 낮아 지원률이 바닥을 기어 한 명이라도 지원해 주면 감지덕지였던 데다 불순분자가 알아서 군에 남아 행동을 통제받고 민간에 방출되지 않겠다 하니 감시 및 세뇌, 전향 등도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장교에 비해 고급 정보를 취급하지도 않아 보안 위험성도 낮았으며, 전향만 확실히 시키면 자신이 한 때 몸담은 운동권 등에 대해 확실히 꿰뚫고 있는 만큼 관련 업무에 투입하기도 좋았다.

 

그러나 부작용도 존재하였는데 전방 철책에 배치된 몇몇 강제입대자들은 군사정권의 탄압에 염증을 느끼고 월북을 하기도 하였다. 녹화사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강제입영된 육군 병사가 아군을 여럿 죽이고 월북한 사건도 있었으며 강제입영으로 내부의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원을 최전방에 보낸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이전 박정희 정권도 눈엣가시인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로 군대로 끌고 갔지만, 무조건 전방철책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일단 입대가 결정되면 다른 신병들과 똑같이 뺑뺑이 돌려서 전국에 분산배치했다. 예를 들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서 강제징집된 정동영은 후방 향토사단이었던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본부대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다만 각 부대 보안대(오늘날의 기무부대)가 이들을 집중관리했다고는 한다.

 

거치적거리는 운동권 대학생들을 가혹한 환경의 전방 전투부대에 배치해서 뺑이 치게 하는 게 당시 신군부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방이라고 모두 편한 꿀보직도 아니고 오히려 전방철책보다 힘든 곳도 수두룩한데, 정권과 체제에 극도의 반감을 가진 인물들을 무조건 전방에 보냈다는 거 자체가 당시 신군부의 인물들이 얼마나 군의 현실을 모르는 똥별들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냥 전방은 힘들고, 후방은 편하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에 월북이나 총기사고 등의 위험성 등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녹화사업 대상자들을 무조건 전방으로 배치한 것은 단순히 고생 뿐만 아니라 몸이 망가져와서 민주화운동 & 학생 운동을 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전방의 강원도나 철원 같이 극한의 추위나 열악한 환경으로 고생하는 곳으로 가서 동상에 걸리거나 병들어 제대해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아니면 가서 확 죽으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당시 강제입대자들이 배치됐던 곳들은 지금도 겨울에는 날씨가 워낙에 추워서 동상환자가 속출하는 등 생활환경이 열악하다. 군장병 복지, 인권을 부르짖는 지금도 이러니, 병사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던 군사정권 시절 1980년대 초중반에는 훨씬 더 가혹했을 것이다. 특히 녹화사업 대상자에게는 근무생활을 더욱 가혹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몸이 병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보상? 당연히 그딴 건 없었다. 이를 통해 본다면 5공 정권은 단순히 이들을 고생시키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병들게 하거나 죽게 하려는 의도 역시 충분히 있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 녹화사업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꽤 신빙성 있는 증언도 많다.

 

당시 정권은 이렇게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된 병사/수병들에게 대학 내 학생운동을 감시하고 방해하는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온갖 폭력이 동반되었다. 이런 고문을 견디다 못한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수많은 군 의문사 사건 중에는 녹화사업 대상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현재 유명인사가 된 486세대 정치인들 중에도 이 사업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이들이 제법 있다. 대표적으로 전직 보건복지부장관이면서 현직 작가인 유시민 또한 녹화사업 해당자였는데 당시 보고서에는 녹화완료로 처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전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던 정병국 의원도 1980년 5.17 내란 직후 녹화사업 대상자가 되어 해병대에 징집됐다.

 

 

상기 사진은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에 있는 녹화사업 희생자 추모비.

 

이렇게 입대한 이들은 제대한 이후 학교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학생들을 강제적으로 휴학시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이후 남은 학기를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군 입대 중 의문사한 6명의 학생들(이윤성, 김두황, 정성희, 최온순, 한영현, 한희철)을 위로하는 위령비를 고려대학교 민주광장[23]에 건립하였으며, 이 비석은 아직도 남아 있다.

 

당연히 6명의 학생만이 녹화사업의 희생자였던 것이 아니고, 당시 군 내부, 특히 정보기관인 보안사에서 비밀리에 추진한 일이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애초에 강제입대 자체가 워낙 학부모들과 사회의 반발이 심했으므로 1984년 9월 13일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때 녹화사업도 공식 중단되었다고 발표했지만, 2005년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확인해낸 것처럼 이러한 발표는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2005년 12월 19일에 국방부 과거사위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특별 정훈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강제입대를 안 시켜서 그렇지 대학생 입대자에게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하는 행위나 군내 의문사는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군 내부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다. 심지어 다음 정권인 노태우 정부까지도 계속되었는데, '평양축전 참가를 위한 군산대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다 강제입영된 최홍기 이병이 가혹행위 및 반공교육을 받다 1991년에 탈영 후 양심선언을 했다가, 1993년에 구속됐다. 해당 사건은 <월간 말> 1991년 6월호에서도 보도됐다.

 

노골적이지 않아서 이슈가 안 되었을 뿐이지 2010년대 중반의 군대에서도 각 군 훈련소에서 기무사 파견 인원들이 신병들을 모아놓고 데모에 참여해보거나 참여한 적이 있는, 혹은 그런 사람을 아는 이는 잠깐 면담할 테니 나와라 하는 식의 사상검증 행위를 여전히 한다. 혹은 신병 총원을 불러모은 뒤 설문조사를 실시해 일부를 추려내 면담하기도 한다.

 

이는 겸사겸사 기무사령부나 기타 정보관련 특기 등에서 근무할 이들을 선발하기 위한 조사 과정이기도 하여, 여기서 대답 잘 하거나 좋은 정보 등을 알려주거나 한 인원들은 기무부대 등에 가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다만 인생 피곤해질 확률이 좀 있고 안 그렇더라도 사람에 따라 뒤가 괴로워질 수 있어 안 가는 게 낫다고 한다. 특히 뭔가를 함구하거나 자신만 알고 묻어놓는 게 힘든 사람은. 말은 쉬워 보이겠지만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꺼림칙한 정보를 접하게 될 수도 있다. 예전 군의 민간인 사찰 사건을 결국 폭로해버린 사람도 현재 우리나라 국적을 버리고 망명하였으며 함부로 발을 못 들여놓고 있다. 정보 관련 보직 자체가 굉장히 까다롭다. 게다가 부대 특성상 군기도 심하게 빡세다고 한다. 옛날에 디시에 음어표를 찍어올려서 문제가 됐고, 결국 잡혀들어간 사람도, 군 복무 중 너무 심한 압박을 받은 게 계속해서 발현됐고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서 홧김에 간부에게 보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게다가 선발되고 나서부터 제대 이후까지도 어느 정도의 사찰대상이 된다고 하니, 정확한 사실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꺼림칙하니 되도록이면 기피하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간단하게, 면담 때 나는 제대 이후 보안 등의 사항을 준수하기 어려운 주변 관계와 사회적 위치에 있고 성격/성향상으로도 그렇기 때문에 정보병과의 복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된다. 다른 부대라면 인원 모자랄 경우에는 그에 상관없이 성격개조를 시켜서라도 끌고가려 할 수 있지만, 정보 관련 보직들은 간부 입장에서도 매우 예민한 병과이기 때문에 자기 입으로 저리 말하는 꺼림칙한 신병을 들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울러 최근까지 알게 모르게 행해지고 있던 운동권 출신 또는 데모에 참여한 적이 있는 육군훈련소 입대자의 전투경찰 전환복무도 어찌보면 녹화사업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부 입장에선 "데모질 실컷 했으니 군대 가서 데모 진압하며 그간 한 짓거리를 반성하고 속죄하라."하는 의미도 있고, 운동권들이 이렇게 자기가 가기 싫어도 강제로 끌려가 전경 차출된 이들조차 배신자로 매도해 전역 후에 배척하는 성향을 이용, 운동권의 분열을 노린 의도도 있었다. 현재는 지원제인 의무경찰만 남고 강제 차출하는 전투경찰은 폐지되었으므로 해당없다. 단지, 운동권들이 누가 의경 간다고 하면 좀 안 좋게 보는 분위기는 남아 있다.

 

이와는 달리 석사장교라는 제도도 있었는데 당시 권력층의 자제들은 이를 이용하여 군 생활을 6개월만 하고 그것도 장교인 육군 보병 소위로 군 복무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쳐서 활용하였는데, 당시 군부 권력자들의 아들들 또는 사위들은 이를 이용하여 (훈련과정을 제외하면) 입대와 전역을 하루만에 해치우기도 하여 큰 대비를 이루고 있다. 다만 의외로 석사장교들이 병사들을 마구 괴롭히며 못살게 구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계급 차이는 엄청나긴 하지만 명색이 같이 고생하는 전우라서 함부로 대하기는 좀 뭐하다는 경우도 있었고 석사장교라고 해서 6개월의 훈련과정 동안 무조건 사령부 같은 편한 부대로 간 건 아니었으며 최전방 같은 불편한 부대로 간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뭣보다, 소위 길들이기 같은 악폐습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시절이었던 만큼 잠깐 체험이나 하다 가는 석장 소위들이 사병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장 이 이유로 1994년에 53사단 장교 무장탈영 사건이 터졌을 정도였다.

 

매체에서

드라마 제5공화국의 한 에피소드가 이 녹화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가상의 녹화사업 희생자와 같은 부대원들인 육군 병사들이 달고 있는 부대 마크는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녹화사업 대상자가 배치되지 않은 부대를 모르고 쓸 경우 혹은 실제로 썼다 해도 증거를 대지 못할 경우 그 부대에서 소송 등의 명예훼손에 대한 이의 제기를 해올 것을 우려해 가상의 부대 마크를 달았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유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화제가 된 노래 소격동은 녹화사업으로 인해 벌어진 소격동 사건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격동에 녹화사업을 주도한 기무사령부가 있었다는 점, 뮤직비디오에 나온 상황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