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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사람들

1990년대

2021.01.06 13:37

최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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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69년~1990년
당시 21세
경북 울진군 출생
이력 1987년 한양대 섬유공학과 입학

1988년 전방입소 반대특위 부위원장 활동 중 구속

1990년 11월 8일 한양대 옥상에서 투신하여 운명

최응현.fw.png

 

 

최응현 열사는 1969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하여, 1987년 한양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하였다.

 

최응현 열사는 강원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큰형 최응석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대학에 대학생의 군사훈련 교육인 교련이 남아있던 1988년 당시 대학가에서는 전방입소 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최응현은 전방입소 반대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886월 대검찰청 점거농성으로 구속됐다.

 

11월에 집행유예로 출소하였다. 출소 이후 이듬해 최응현은 1989년 공대 학생회 홍보부장, 1990년 반미소위원회 활동 등을 했지만, 가정 경제 형편상 다시 휴학과 복학을 하는 등 고난을 겪었으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변혁운동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실천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90118일 한양대 교내 건물 옥상에서 민주화투쟁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였다.

 

열사는 유서에 -동지들에게 후배들에게 자랑스럽지는 못할지라도 떳떳하게 남고 싶어서 나름대로 노력은 해봤지만 주위조건들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폐인이 되어진다

 

끝끝내 동지들에게 힘을 줄 수 없는 나를 용서해주길 바란다-라고 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더 열심히 참여하지 못한 자신의 아픔을 대신하여 많은 이들이 민주화 운동을 해달라는 열사의 유언을 많이 이들을 울렸다.

 

젊은 청년학도의 순수한 열정은 우리가 계승하고, 열사의 뜻을 이어 평등과 평화 자주의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전방입소 반대투쟁에 대한 설명

 

개요

대학가에 행해지던 전방입소훈련을 반대하는 서울대학생들의 시위에서 김세진과 이재호가 분신한 사건.

 

배경

전방입소훈련에 대한 반발

그때는 학생들을 군 조직의 일부로 취급하던 시기였어요. 1학년 때는 문무대라고 불렀던 학생병영훈련소에서 일주일 정도 내무반 교육과 사격 훈련을 받았고, 2학년 때는 전방입소훈련이라고 해서 실제 전방 부대에 들어가 병영문화를 강제로 체험하게 했죠. 총학생회가 있기 전에는 학도호국단으로 학생들을 관리했고, 2학년 때까지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을 정도였어요. - 김세진,이재호기념사업회 회장 장유식

 

당시에는 교련이 교육과정에 남아 있었는데, 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학생들은 2학년이 되면 필수과목으로 '전방입소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 훈련은 학생들을 군부대로 불러 모아 약 일주일 간의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대학생들이 군부대에 가서 군대예비체험(...)을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강했다. 먼저 운동권 학생들은 전방입소훈련을 미제국주의의 용병교육이라고 여기며 강하게 반발했다. 일반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들의 반발도 상당했다. 그래서 86년부터는 전방입소훈련에 반대하고 그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학생운동의 대세, 반미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소수의 선도 투쟁이었다면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은 이론을 토대로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죠. 하지만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농성자들도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 단지 광주학살의 배후를 묻고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것에 문제 제기하러 들어온 거다.’ 국민적 정서를 고려한 거죠. 그런데 86년이 되면서 반미를 전면적으로 내걸고 투쟁하게 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지요. - 김세진,이재호기념사업회 회장 장유식

 

1980년대 민주화운동 중에는 '반미자주화운동'이 있었는데 이 경향이 운동권 학생들에게 빠르게 퍼져갔다. 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하여 새롭게 운동권이 된 사람들은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된 경우가 많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미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 등을 통하여 반미 성향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80년대 학생운동에서 '반미'라는 것은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였다. 다만 처음에는 반미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었다. 헌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반미' 정서는 점점 짙어져 갔다.

 

전개

전방입소 거부투쟁 시위의 계획

1986년 초 성균관대의 학생들이 전방입소훈련을 거부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대의 운동권 조직들은 자신들도 전방입소훈련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서울대도 곧 전방입소훈련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4] 1986년 4월 16일 '전방입소훈련전면거부 및 한반도미제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전방입소거부특위)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총학생회장 김지용을, 부위원장에 이재호를 선출했다. 이 단체는 결성되자마자 곧바로 시위를 계획했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전방입소를 거부하는 내용의 홍보를 진행하고 홍보지나 책자를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런 활약으로 서울대의 각 과들과 단과대학들은 서로 전방입소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고무된 전방입소거부특위는 4월 28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농성할 계획을 짰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학교 측이 4월 28일부터 3일 간의 도서관 휴관을 공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종로구 연건캠퍼스 의대 도서관을 농성 장소로 정했다. 거사일도 전방입소 전날인 27일로 정하고 지도부는 김세진과 이재호로 정했다. 그러나 두번째 계획도 정보가 노출되어 도서관 앞에 경찰이 진을 치는 바람에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두번째 계획까지 무산되자 그 날 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또 다른 농성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오랜 토론 끝에 학교와 가까운 신림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당시 서울대 인문대학 학생회장이었던 이정승은 신림사거리에 대하여 "신림 사거리는 전에도 가끔 가두투쟁 장소로 활용됐었죠. 의대 도서관 농성이 불발로 그치면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기 때문에 다시 시내에서 집회를 잡기에는 무리였어요. 학교와의 근접성이 가장 크게 작용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시위날짜는 4월 28일로 정해졌고, 세번째 계획의 지도부는 두번째 계획과 동일했게 김세진과 이재호였다.

 

시위와 분신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중략) 저의 행위는 한순간의 영웅심이나 학생회장이라는 것 때문에 억지로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학 들어와서 읽은 수백 권의 책과 객관적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고뇌하며 오랜 시간 고민하여 얻은 결론입니다. (중략) 이 땅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교도소 안에서 고민하고 나와서도 변혁 해방운동에 이 몸을 바칠 것입니다. 구치소로 이송되면 다시 편지 드리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 1986년 4월 26일, 김세진이 부모에게 쓴 마지막 편지

물론 예고 없는 저의 결단으로 인한 충격에서 오는 부모님의 슬픔과 노여움에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지만 저의 생각과 행동이 결코 공호한 불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이 장기적 전망과 믿음 속에서 증명되는 날 기쁨의 해후를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중략) 오래전부터 저는 자신의 삶을 준비해왔고 비로소 드러냈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 이재호가 부모에게 쓴 마지막 편지

 

1986년 4월 28일, 전방입소가 계획되어 있던 400여명의 85학번 학생들이 가야쇼핑센터 부근에서부터 신림사거리까지 도로를 점거했다. 이들은 연좌한 채로 시위에 나섰다. 신림사거리 근처의 서강빌딩[5]에서는 김세진과 이재호가 올라가 있었다. 여기서 둘은 학생들의 시위를 선도하면서 핸드마이크로 전방입소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유인물을 뿌리며 "반적반핵 양키 고 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라고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도 둘을 따라서 구호를 복창하며 시위를 했다.

 

몇 분 후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들은 거리를 차지하고 있는 학생들을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끌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이 있던 건물에까지 경찰이 왔다. 경찰들이 올라오자 김세진과 이재호는 가지고 온 시너를 온 몸에 뿌리고는 경고했다.

"시위대에게 덤벼들지 마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가까이 오면 분신할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진압작전을 계속 펼치며 둘에게 다가왔다. 마침내 김세진과 이재호는 가지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켰다. 그러자 온 몸에 불이 달라붙었다. 이재호는 불에 타는 채로 옥상에서 추락했고, 김세진은 옥상 바닥에 쓰러졌다. 둘을 잡으러 온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던 학생들은 모두 그 분신을 목격했다. 그렇게 둘이 시야에 보이지 않자 인문대학 학생회장 이정승이 대신 시위를 주도했다. 학생들은 김세진과 이재호를 생각하며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경찰에 연행되는 와중에도 학생들의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

 

사망

 

온 몸이 숯덩이가 된 채로 김세진과 이재호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다. 김세진은 전신의 60%에, 이재호는 전신의 80%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둘은 고통스러운 상황임에도 서로를 걱정했다고 한다. 김세진은 5월 3일에, 이재호는 5월 26일에 각각 사망했다. 둘 다 23살의 청년이었다. 둘의 장례식은 그 해 5월 30일에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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