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모란공원사람들

2000년대

2021.01.06 12:52

김병권

조회 수 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생애 1921년~2005년
당시 84세
대구시 동구 출생
이력 1946년 대구 '대중신문' 기자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수배당하여 피신, 1968년 '남조선 해방전략당' 사건으로 투옥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형 확정

2005년 9월 21일 출옥 후 범민련 등 활동하다, 2003년 발병한 뇌졸중 투병 중 운명

김병권.fw.png

 

 

김병권 선생은 평생을 통일운동에 힘쓴 통일운동가로,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부터 6회에 걸쳐 투옥되어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투옥과 석방을 되풀이하면서도 통일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19212월 대구에서 출생한 선생은 4.19 혁명 당시 사회당 대구지부 민족자주통일협의회에서 활동했으며,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구속돼 옥고를 치르고 그해 12월 출소했다.

 

19762월 반유신 민주화운동 및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목표로 결성된 `남민전 준비위원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같은 해 3월 반공법으로 구속돼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7910월 남민전 사건이 다시 불거지면서 선생은 청주보안감호소 수감 중 추가 기소돼 재판을 받았으며 8812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12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후 1991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준비위원회 발족에 참여해 숨지기 전까지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및 통일연대 고문이라는 직함을 갖고 활동해 왔다.

 

 

199511월 범민련 남측본부 사건으로 구속되어 3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8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후에도 6·15공동선언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고문,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20059월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고, 장례는 범민련과 통일연대가 주최한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졌다.

선생은 남민전 사건으로 함께 옥고를 치렀던 고() 김남주 시인의 시집 <사상의 거처>에 등장하는 `김병권 선생님'의 실제 인물이다.

 

 

 

-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에 대한 설명

 

정의 

1976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

 

  내용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으로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한 비밀 지하조직이다. 1979년 10월 9일과 16일 그리고 11월 3일 등 3차례에 걸쳐 구자춘 내무장관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민전 결성을 주도한 이재문은 경북대를 졸업하고 민족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가담해왔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1974년 민청학련과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자 신분이 된 상황 하에서 남민전을 결성한 것이었다.

남민전은 1977년 1월 반(半)합법 전술조직으로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8차례에 걸쳐 배포하는 등 반유신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면 청년학생위원회와 함께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교원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주요 활동은 유인물 살포 등과 같은 선전전이었으나 혜성대라는 별동대를 만들어 자금조달을 위한 강탈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활동이 꼬투리가 되어 1979년 10월 4일 공안기관에 의해 이재문(李在汶), 이문희,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등이 체포되고 그해 11월까지 84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재문은 1981년 11월 22일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김남주 이수일 등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관련자들은 형 만기 등으로 1988년까지 모두 석방되었으며 2006년에는 관련자 중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이 반유신 활동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南朝鮮民族解放戰線事件))].

 

- 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 대한 설명

 

1990년 11월 20일 조국통일 실현을 목적으로 남측, 북측, 해외동포들이 결성한 통일운동연합단체.   

정의 

1990년 11월 20일 조국통일 실현을 목적으로 남측, 북측, 해외동포들이 결성한 통일운동연합단체.

키워드

범민족대회

 

  개설

조국통일 실현을 목적으로 남한과 북한, 해외동포들이 결성한 통일운동 단체로, 범민련이라고도 한다.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제1차 범민족대회의 결의에 따라 1990년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결성되었다. 범민련은 남·북·해외 3자 조직이 하나의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 활동하는 거족적인 통일운동 연합체이다. 범민련에는 최고의결기구로 조국통일범민족회의와 그를 대신하는 남과 북, 해외중앙위원연석회의, 범민련공동의장단, 공동사무국이 있다. 범민련 북측본부(초대의장 윤기복)는 1991년 1월 25일에 결성되었으며, 남측 본부(초대의장 강희남)는 1995년 2월 25일 결성되었다. 그리고 해외본부는 1990년 12월 16일에 결성되었다. 1997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 단체에 대해 이적단체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설립목적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과 6·15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범민족적인 통일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결성에 관한 논의는 1988년 8월 1일 남한의 각계인사 104명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취지문 」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 남측은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이 다 참여하여 조국통일방안과 통일실천과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9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허담)에서 지지성명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90년 12월 16일 해외본부가 제일 먼저 결성되었으며, 이듬해 1991년 1월 24일 북측 본부가 결성되었다. 남한에서도 1991년 1월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본조직 결성이 지체되다가 1995년 2월 25일 남측본부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현황

1997년 5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는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이적 단체 판결을 받았다. 당시 대법원은 “통일의 모색과 북한과의 접촉에 있어 일관된 조율과 신중한 정책추진이 필요한 현재의 실정 하에서 강령의 일부로서 북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외국군 철수, 핵무기 철수,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제반 악법의 철폐 등을 채택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이적단체에 해당" 한다고 판단하였다.(대법원97.5.16 선고 96도2696 판결)또한 범민련 남측 본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민족의 진로』도 이적 표현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2018년 남북관계 개선으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를 비롯한 제 단체들은 2018년 8월 14일 저녁 8시 동국대학교에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조국통일촉진대회’(조국통일촉진대회)를 개최하여 남한, 북한, 해외의 공동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국통일범민족연합(祖國統一凡民族聯合))]

 

 

- 5.16쿠데타에 대한 설명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과 김종필 등 정군파(整軍派) 장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사쿠데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오일륙(五一六))]

정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과 김종필 등 정군파(整軍派) 장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사쿠데타.

키워드

박정희

군사쿠데타

김종필

장면

4·19혁명

 

  역사적 배경

5·16은 국내적 배경과 국외적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국내적 배경은 또한 군 내부 배경과 정치·사회적 배경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군 내부 배경을 보면 한국전쟁을 통한 군부의 급속한 비대화가 있다. 한국전쟁 이전 10만여 명 내외에서 60만 명 이상으로 확대된 군부는 미국의 집중 원조를 받았는가 하면 주요 군 간부들은 미국 유학을 통해 근대적 기술과 사고방식을 접하게 되어 여타 사회 분야에 비해 엘리트 의식이 매우 강화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 과정은 군부 엘리트 장교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박정희와 같은 정치지향적 군인을 양산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전쟁을 통해 초창기 군 간부들은 고속 승진할 수 있었으나, 육사 8기생 등 후배 그룹들은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1950년대 군부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청년장교들의 불만을 더욱 강화시키게 되어 이른바 정군운동이 발생하는 등 쿠데타의 한 배경을 이루었다.

국내 정치사회적 배경으로는 첫째, 4·19혁명 이후의 정치·사회적 정세의 유동성이다. 4·19혁명으로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나 이를 계승한 장면 정권은 4·19혁명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면 정권의 부정축재자, 선거부정 관련자 처리도 지지부진했고, 특히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이라는 2대 악법 제정 시도와 같이 대중적 진출을 억압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커다란 반발만 불러왔다.

두 번째는 장면 민주당 정권의 내분이었다. 신파와 구파로 분열된 민주당은 극심한 내부 분열로 제대로 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장면 주도의 신파와 윤보선·김도연 등의 구파는 총리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격돌한 이래 사사건건 대립했다. 결국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이 결정되기는 했지만 분열은 더욱 극단화되어 구파는 1960년 9월 22일 민주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여 극한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장면 정권은 두 달이 멀다 하고 개각에 개각을 거듭해야 하는 정치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세 번째는 혁신계, 학생·청년, 노동 분야 등을 중심으로 진행된 사회운동의 양질적 발전이었다. 혁신계는 주로 명망가 중심의 정당운동을 전개했지만, 학생과 청년 부분은 실질적인 대중동원력을 갖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혁신계와 청년·학생운동은 통일운동을 중심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는데, 보수 진영의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라는 역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교원노조 운동 등으로 나타난 노동운동 또한 기존의 억압적 노동통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기존 지배질서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회운동 세력의 힘이 기존 질서에 실질적 위협으로까지 성장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단적으로 7·29총선에서 혁신계는 고작 5석에 그쳤을 뿐이며, 통일운동이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노동운동 또한 본격적 산업화 이전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리고 사회운동은 쿠데타 세력에 의한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의 희생양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국외적 배경으로는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가 중요했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직접 원조를 삭감하면서 피원조 국가의 자체 생산력 강화를 도모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로스토우(Rostow) 등의 근대화 노선으로 연결되었다. 미국의 근대화론에서는 경제성장 문제가 매우 중요한 과제였으며, 이를 추진할 근대적이고 강력한 리더십 문제를 강조했는데 군부가 새로운 리더십의 주요 구성부분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쿠데타 발발과 진압에 결정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아울러 1950년대 세계적으로 군사 쿠데타가 빈발하고 있었다는 점도 하나의 배경을 이루었다.

 

  경과

군사 쿠데타 세력의 움직임은 4·19혁명 이후 처음 정군운동(整軍運動)으로 나타났다. 4·19혁명의 여파로 군 내부에서도 군의 부정부패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타나게 되었고 인사적체 등 군 내부 불만과 결합되어 정군운동이 전개되었다. 먼저 1960년 5월 2일 박정희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 3·15부정선거와 각종 군부 비리의 책임을 물러 송요찬(宋堯讚) 참모총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어 5월 8일에는 김종필(金鍾泌)·김형욱(金炯旭)·길재호(吉在號)·옥창호(玉昌鎬)·신윤창(申允昌)·최준명(崔浚明)·석창희(石昌熙)·오상균(吳尙均) 등 육사 8기생 8명이 정군을 위한 연판장을 작성하였다가 국가반란음모라는 죄목으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뒤에 연합참모부장인 최영희(崔榮喜) 중장과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 팔머(W. B. Palmer) 대장의 성명을 성토하여 세칭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으로 피소되기도 하였다.

정군운동의 결과 1960년 5월 20일 송요찬 참모총장, 5월 31일에는 당시 한국군에서 최고 계급을 갖고 있던 백선엽 대장 등이 자진 사퇴를 발표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미국의 반대와 허정 과도정부의 미온적 대응으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특히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매그루더는 송요찬의 사임 직후인 1960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거의 매일 공개적으로 4·19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이 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며 정군운동을 견제하는 발언을 했다.

장면 정권 하에서도 정군은 지지부진하였다. 정군운동은 사실상 중장급 장성들의 반수 정도가 퇴진하고, 소장 3명이 퇴진한 것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었다. 한편 군내에서 하극상으로 간주되는 집단행동을 한 영관급 장교들도 역시 미온적으로 처리되었고 정군파 장교의 실질적 리더였던 박정희도 12월 7일에 한직(閑職)인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는 정도였다. 결국 장면 정권은 정군운동을 미온적으로 처리하여 군 내부 불만을 해소하지도 못했고 또 쿠데타 주도세력의 형성을 막지도 못하였다.

이에 1960년 가을부터 일부 정군파 장교집단을 중심으로 쿠데타 모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통해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쿠데타를 결의했다. 김종필 중심의 영관급 장교들은 박정희 세력과 결합되어 쿠데타 핵심 주도세력을 형성하고 본격적인 세력 규합에 나섰다. 특히 이들은 이른바 ‘비둘기 작전’이라는 장면 정권의 폭동진압계획을 적극 활용했다.

장면 정권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고양을 군사력 중심의 물리적 탄압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비둘기 작전’이라는 폭동진압 계획이었고,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할 적임자로 장도영을 선택해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장도영은 주요한 정군 대상 인물로 예편원까지 제출했었는데, 매그루더의 지원과 장면 정권의 정치적 이해가 맞어떨어져 결정적 시기의 참모총장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쿠데타 주도세력은 장면 정권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해 폭동진압작전에 동원될 서울 근교 부대들의 장교들을 집중적으로 포섭했다. 그 결과 육군 제6관구사령부·육군 제33사단·육군 제34사단·육군 제12야전공병대·육군 제1공수단과 육군본부·국방부의 중견장교들이 다수 쿠데타 세력에 포섭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金潤根) 준장이 중심이 된 군사 쿠데타 계획도 있었지만 육군의 쿠데타 세력과 연결되면서 통합되기도 하였다.

한편 장도영이 참모총장이 된 것은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박정희는 오랫동안 장도영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장도영이 2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박정희는 휘하의 부사령관이었다.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대령이나 제1공수단장 박치옥 등은 박정희보다는 장도영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당시 항간에는 쿠데타설이 파다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는데 1961년 들어서는 이른바 ‘3·4월 위기설’이 대두되어 사회적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이때부터 쿠데타는 모의 단계를 넘어 본격적 실행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1961년 3월 경부터 폭동진압계획에 동원될 군부대 장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조직된 장교 40여 명이 쿠데타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박정희와 함께 1961년 4월 6일 명동의 양명빌딩에 모여 쿠데타 참여를 맹세했다.

이렇게 쿠데타 준비를 마친 이들은 1961년 4월 19일 4월혁명 1주기 때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 폭동진압 명령이 내려지면 자연스럽게 시내로 진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의 실행을 위해 학생들의 시위를 과격한 방향으로 조장하기 위해 비밀공작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과 달리 조용하게 지나가자 5월 12일을 다시 거사일로 정했다. 이 계획 역시 사전 정보 누설로 무산에 그치고 마침내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혁명기도의 정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보기관에 알려졌고, 그 때문에 장면 총리와 현석호(玄錫虎) 국방장관이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물었으나, 장 총장은 “박정희 소장은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답변으로 수뇌부를 안심시켰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하게 된 것을 기점으로, 공수단은 박치옥(朴致玉) 대령에 의하여 출동하고, 제6군단 포병대는 군단참모 홍종철(洪鍾哲) 대령과 문재준(文在駿) 대령·구자춘(具滋春) 대령에 의하여 제933대대, 백태하(白泰夏) 중령에 의하여 제822대대, 김인화(金仁華) 중령에 의하여 제911대대가 각각 출동하였다.

한강 대교에 도달한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병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총격전 끝에 서울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접수한 제6군단 4개 포병대와 합류한 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상오 4시 30분경 각각 접수하였다. 또한 공수단은 장면 총리의 숙소이던 반도호텔을 급습하였으나, 총리의 도피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장면 총리는 애초 쿠데타 소식을 듣고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고자 했으나 신원불상자라는 이유로 출입이 저지되었으며 재차 미 대사관 숙소로 피신하고자 한 시도도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이에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혜화동의 깔멜수녀원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당시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실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주요 군 지휘자 중의 하나였던 1군사령관 이한림은 쿠데타 진압에 적극적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모호한 입장과 국군끼리 피를 흘릴 수 없다는 윤보선 대통령의 입장으로 진압작전은 시행될 수 없었다.

사실상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자 쿠데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쿠데타군은 서울 전역을 장악하고, 지방에서도 중요 도시인 대구·부산·광주·대전 등지를 장악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쿠데타군은 이날 상오 5시 서울중앙방송국 첫방송을 통하여 “우리 군부가 궐기한 것은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목적을 전하고 이른바 ‘혁명공약’ 6개 항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④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⑤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이 공약은 김종필 주도로 작성되었으며 당시 지식인 사회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사상계』를 많이 참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방송은 이 날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되어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통합 장악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위원회는 임시 육군본부 상황실에 설치되었고, 장도영 참모총장은 그 날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장면 총리가 5월 18일 은신처였던 깔멜 수녀원에서 나와 중앙청에서 제69차 임시각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장면은 은신처에서 미국 대사관 등과 연락해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총리가 은신처에서 나와 주도적으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미국의 군사력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쿠데타 진압은 사실상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고 장면으로써는 달리 도리가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로써 장면 정권은 9개월 만에 와해되고 본격적인 군정이 시행되었다. 이 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군사혁명 지지의 시가행진이 있었고, 미국 국무부는 한국의 군사정부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한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김종필과 회담을 가진 뒤, 군사 쿠데타를 인정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은 박정희·유원식(柳原植)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올 것이 왔다.”는 모호한 논평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5·16은 명실공히 성공을 거두고, 같은 날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고쳐,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를 비롯한 30명의 최고위원으로 구성되고, 고문에 김홍일(金弘壹)·김동하(金東河)를 추대하였다.

 

  결과

쿠데타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조직되어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내각을 조직하고, 내각 수반에 장도영 의장을 겸임시켰다. 그러나 실권은 부의장인 박정희 소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 김종필에게 있었다. 이에 불만이던 장도영이 반혁명사건으로 체포된 뒤부터 쿠데타 주도자였던 박정희 소장이 명실상부한 군사정부의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군정은 먼저 혁신계를 비롯한 좌파 정치세력을 용공혐의로 대거 체포하는가 하면 1961년 7월 4일에는 「반공법」을 제정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면서 정치적 억압체제를 구축하였다. 1962년 3월 16일에는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여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으며 김종필 주도로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켜 향후 수십 년 간 지속된 정보정치, 공작정치의 출발을 알렸다.

사회 분야에서 병역기피자·밀수·조직폭력배 등 이른바 ‘사회악’ 일소를 위한 강력한 단속을 시행함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강화하고자 하기도 하였으나 언론 검열을 실시하는가 하면 언론정화라는 명목으로 공보부를 신설하여 언론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쿠데타 공약에서 내건 민생문제의 안정을 위하여 농어촌고리채(農漁村高利債) 정리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농촌 실정에 맞지 않아 그 효과는 미미하였다. 군정의 가장 두드러진 정책 중의 하나는 ‘재건국민운동’이었다. 생활개선·정신개조 등의 목적으로 출발한 재건국민운동은 군정의 가장 중요한 대중동원정책이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군정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이었다. 장면 정권이 준비한 계획을 부분 수정한 애초의 경제개발계획은 국내자본 중심으로 수입대체 산업화를 겨냥한 성격이 짙었다. 이를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였으나 그 성과는 미미하였으며, 미국의 압력 등으로 애초의 계획은 대폭 수정되어 수출 주도 산업화로 변경하게 되었다.

군정을 실시하면서 애초 쿠데타 세력들은 조기 민정이양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민정이양 자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수십 년 이상의 군정을 예상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집중적 압력과 국내 정치세력의 반발로 민정이양 일정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 주한미대사였던 사무엘 버거는 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의 중요성과 민간 엘리트를 동원한 정권안정의 중요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했고 정치적 협력을 약속했다. 결국 1962년 12월 17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여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선거제도를 제1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되돌려 놓은 다음 1963년 10월 15일에 제5대 대통령 선거 실시가 예정되었다.

선거 준비를 주도한 것은 김종필 중심의 중앙정보부였다. 미국의 CIA를 모방해 설치한 중앙정보부는 지식인을 대거 동원해 주요한 정책을 개발하는가 하면 구 정치인을 포함한 정당 결성에 주력했다. 중앙정보부는 정당 결성 및 대통령 선거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증권파동이라 불리는 주가 조작사건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조성해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빠친코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등에도 깊숙하게 연루됨으로써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이 불거져 구악을 대신해 신악이 나타났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중앙정보부가 주도해 창당된 민주공화당(공화당)은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윤보선과의 대결에서 가까스로 승리해 제3공화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5·16군사쿠데타는 향후 30년 이상 지속된 군사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30여 년은 민주주의의 암흑기였다. 쿠데타는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행위이기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었다. 정부 수립 후 불과 13년 만에 이루어진 군사 쿠데타는 헌법 질서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그것을 붕괴시킨 사건이었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시련이었다. 다음으로 군사 쿠데타는 전 사회의 군사화 내지 병영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군사 엘리트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모든 가치의 중심에 군사적인 것이 놓이게 되었다. 전 사회를 군대식 관리와 통제 하에 두고자 하였으며 국가 정책 또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내건 근대화는 바로 이러한 군사적 견지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이는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사회를 오직 효율성과 목적 달성이라는 군사주의적 시각이 지배적인 입장이 되도록 만들었다.

한편 5·16군사쿠데타는 본격적인 경제개발 추진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은 이미 장면 정권에 의해 준비된 것이기도 했지만 실제 추진은 군사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사정부와 그 뒤를 이은 제3공화국은 경제개발에 모든 사회적, 인적 자원을 집중 투입하였다. 노동자·농민 등의 삶을 희생시켜서라도 급속한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군사정권은 비민주적이고 반동적인 근대화 정책을 집행한 것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오일륙(五一六))]

 

 

- 10월 유신에 대한 설명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과 지배체제 강화를 위하여 단행한 초헌법적인 비상조치.   유신쿠데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시월유신(十月維新))]

정의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과 지배체제 강화를 위하여 단행한 초헌법적인 비상조치.유신쿠데타.

키워드

통일주체국민회의

긴급조치

 

  개설

박정희 대통령이 안보위기 및 남북대화를 빌미로 실시한 일종의 초헌법적인 비상조치로서, 이로써 유신체제라 불리는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성립되었다. ‘10·17비상조치’의 내용을 살펴보면, ① 국회 해산과 정치활동 중지 등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 정지, ② 비상 국무회의가 효력이 정지된 일부 헌법 기능 수행, ③ 비상 국무회의의 헌법 개정과 국민투표, ④ 개정 헌법에 따른 헌법질서 성립 등이었다.

 

  연원 및 변천

10월 유신의 정치적 동기와 배경에 대해 박정희는 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균형 변화와 안보 영향, ② 남북관계 변화, ③ 남북대화 지속 필요성, ④ 무질서와 비능률, 파쟁과 정략에 따른 남북대화 지원체제 약화 등을 열거하면서 체제개혁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추진한 이유는 국내 정치적 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박정희는 안정적인 권력재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69년 삼선개헌에 따라 치러진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과 박빙의 승부를 펼쳐야 했다. 더욱이 대통령을 세 번 연임한 상황이었기에 네 번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장기집권 욕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박정희로서는 권력 연장을 위한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고 더 이상 기존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1970년 11월 전태일 분신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 8월에는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또한 파월 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 사건도 일어났다. 즉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억압된 대중의 분노와 절망이 다양한 방법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중적 분위기는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커다란 부담이었고 체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보다 강력하고 억압적인 권력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10월 유신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박정희와 최측근 몇몇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조차도 발표 며칠 전에 통보를 받았다. 헌법개정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은 중앙대학교 교수로 있던 갈봉근이었는데, 그는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과 미국의 대통령 중심제 등을 참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상적 근거는 독일의 파시스트 정치철학자였던 칼 슈미트(Carl Schmitt)였고,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예외상황에 대한 인식이 유신헌법 기초에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풍년사업’으로 명명된 10월 유신 준비작업은 공교롭게도 궁정동 안가에서 추진되었는데, 이는 유신체제의 시작과 끝이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셈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27일 유신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붙였다. 국민투표는 91.9%의 높은 투표율과 91.5%의 찬성을 얻었다(총유권자 84%의 찬성). 이와 같이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11월 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그 시행령이 공포되고, 12월 15일 총대의원수 2,359명을 선출하는 선거를 1,630개의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하였는데, 당시 투표율은 70.4%였다. 이어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제1차 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대통령으로 재당선되었고, 12월 27일 취임함으로써 유신체제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내용

유신체제의 기본 골간을 규정했던 유신헌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무시였고, 그것을 명료하게 보여준 것이 통일주체국민회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대통령 선거인단의 역할이었다. 즉 기존의 직접선거 대신 대의원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한 것이었는데, 이는 장기집권을 위한 핵심 제도 장치였다. 게다가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중임이나 연임제한에 관한 규정을 전혀 두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영구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또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선출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국회의원 임기는 6년과 3년의 이원제로 규정되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규정되었다. 즉 권력의 2대 중추라 할 대통령과 국회를 구성하는 역할을 맡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장악한다면 권력의 재생산이 가능해 진 것이었다.

게다가 유신헌법은 국회의 연간 개회일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없앴으며,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심지어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 등은 제소하거나 이의도 제기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명기하였다. 이로써 절차적 민주주의는 거의 훼손된 것이었다.

더욱이 헌법 개정방법을 이원화하여 대통령이 원하는 헌법개정은 비교적 쉽게 하고, 대통령이 원하지 않는 헌법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합헌적인 체제개혁의 길을 봉쇄하였다. 여기에 사법권의 핵심인 대법원장 및 대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함으로써 대통령은 입법·행정·사법의 3권분립을 넘어 초월적인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하였다.

대통령의 초법적 권력을 상징했던 것은 긴급조치였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비상조치권을 구체화한 것으로써 유신체제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지배장치였다. 총 9호까지 선포된 긴급조치는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기존 법과 제도를 뛰어넘는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특히 1975년 선포된 긴급조치 제9호는 이전의 모든 긴급조치를 집약한 것으로써 더 이상의 긴급조치가 나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유신 선포로 수립된 유신체제는 그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절차적 민주주의를 거의 완전히 무력화시킴으로써 독재·권위주의·파시즘 등으로 표현될 만큼 폭압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유신체제는 5·16군사정변을 통해 성립한 박정희 체제를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변화시킨 것이었으며 대중의 반발을 수렴할 별다른 장치가 없는 체제였다.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주체적 민족사관’, ‘국적있는 교육’ 등의 슬로건을 통해 민족주의를 극력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산업화 과정을 통해 소외되고 억압된 대중의 반발을 민족주의적 동질화 논리로 봉쇄하고자 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대중의 불만이 제도적으로 수렴될 수 있는 통로 중의 하나였던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파괴하면서 그 정당성을 한국적 민주주의에서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국회가 파쟁과 정략에 빠진 비효율적 낭비집단 같은 것이라고 보고 일사불란하고 효율적인 동원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즉 사회 각 영역과 계층·계급의 불만과 사회적 적대를 정치적 과정을 통해 조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유신체제는 역대 그 어느 정권에 비해 긴급명령·국가비상사태선포·위수령·대통령긴급조치 및 비상계엄 등의 강압적인 방법들을 동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발과 미니 스커트 단속은 비대해진 국가 강권력이 개인의 기호나 취미조차 통제하고자 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이러한 국가의 강제적이며 폭력적인 모습은 국가 자율성이 더욱 강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경제의 유신으로 불리는 8·3조치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사채 문제를 국가가 개입해 강제로 조정한 8·3조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 및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잘 보여주는 것이 유신체제기에 착수된 중화학 공업화였다. 따라서 정치·경제·사회·개인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국가권력이 개입하게 되었고 그것도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렇게 경직되고 폭압적인 지배체제였음에도 다른 한편으로 유신체제는 광범위한 대중동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이 그것이었는데, 농촌에서 출발해 도시와 공장을 거쳐 사회 전 분야로 확대된 이 운동은 파시즘의 대중동원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즉 유신체제는 고도의 억압과 대중 동원을 통한 지배체제 유지를 도모한 것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시월유신(十月維新))]


위로